터키 남부를 여행하다 보면 웅장한 이슬람 건축이나 로마 유적에 익숙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 페케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전혀 다른 시대의 숨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리키아 연맹의 수도였던 잔토스와 레툰의 유적입니다. 이곳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로마 문명이 섞여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독특한 공간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면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요?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세부 조각들까지 3가지로 나누어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잔토스 유적에서 가장 먼저 볼 것
잔토스는 리키아 연맹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도시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네레이드 기념비입니다.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이 무덤은 바다의 신 네레이스 조각이 얇은 옷을 입은 듯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원본은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고 지금은 복제품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 위엄은 여전합니다. 여기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무덤 옆면을 자세히 보시길 권합니다.
- 네레이드 기념비 옆면의 전투 장면 조각
- 하르피 기념비 정면의 여성 조각상
- 로마 시대 추가된 개선문의 이질적 양식
서로 다른 시대의 조각이 한 공간에 섞여 있는 모습에서 도시의 긴 역사를 직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더라고요.

왜 잔토스 암벽 무덤이 특별할까
리키아인들의 장묘 문화는 주변 문명과 확연히 다릅니다. 죽은 자를 위해 거대한 암벽을 파내어 집 모양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잔토스 언덕 위에 솟아있는 암벽 무덤들은 그 결정체입니다. 목재 구조를 흉내 내어 기둥과 서까래를 정교하게 돌에 새겨 넣었는데, 마치 돌로 지은 목조 주택 같은 착각을 줍니다. 특히 기원전 4세기에 조성된 파올리 무덤은 정면의 이오니아 양식 기둥과 벽면의 프리즈가 압권입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양식이 어떻게 리키아식으로 변형되었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더군요.
레툰 신전 3곳을 구분하는 방법
잔토스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레툰은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의 핵심은 연못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세 신전입니다. 어떻게 구분할까요? 규모와 위치로 짐작합니다.
- 아르테미스 신전: 세 신전 중 가장 동쪽에 위치
- 아폴론 신전: 중간에 자리한 규모가 가장 작은 신전
- 레토 신전: 가장 서쪽에 있는 가장 큰 신전
레토 신전 앞에는 지하수가 솟아오르는 신성한 연못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이 물을 어머니 여신의 젖이라 믿었던 흔적입니다. 세 신전의 기단 높이와 주추의 배치를 비교해 보며 걸으면, 고대인들이 신성함을 부여한 공간의 위계가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진짜 이유
단지 오래된 돌무더기가 아니라, 고대 소아시아의 독자적인 문화융합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리키아 연맹은 최초의 민주적 연방제를 실현한 정치체로 평가받습니다. 각 도시의 투표권이 인구 비례가 아닌 도시의 등급에 따라 배정된 점, 잔토스의 비문에 나타나는 고유 언어와 그리스어의 병기 방식 등은 후대 연방제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잔토스와 레툰은 정치와 종교가 어떻게 결합해 하나의 연맹을 유지했는지 보여주는 입체적 증거장입니다.
더운 날씨에 잔토스 걷는 요령
2026년 6월 터키 남부는 벌써부터 햇살이 따갑습니다. 넓은 유적지를 다리 아플 때까지 걷지 않으려면 동선 짜기가 중요합니다. 잔토스의 경우 언덕 위 네레이드 기념비 쪽부터 먼저 오르고, 내려오며 로마 극장과 비잔틴 성벽을 둘러보는 길이 편합니다. 레툰은 그늘이 거의 없으니 오전 시간대 방문을 추천합니다. 연못 옆 모기가 꽤 많으니 긴 소매 챙기시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치기 쉬운 그리스어 비문 찾기
잔토스 극장 입구와 레툰의 신전 사이에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석재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무심코 지나가는데, 여기에 고대 그리스어와 리키아어가 적힌 이중 언어 비문들이 있습니다. 19세기 학자들이 리키아어를 해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 트릴링구알 비문도 레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조각상의 화려함에 가려져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이 비문 조각들이야말로 잔토스와 레툰을 세계적 유적으로 만든 주역들입니다.

마치며
잔토스와 레툰은 화려함보다는 깊이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지붕 없는 무덤, 그리스 양식을 빌려온 기둥, 로마의 개선문이 한 언덕에 공존하는 풍경은 어딘가 불균형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남들이 큰 돌무더기만 훑고 지나갈 때, 조각의 옷주름 하나와 비문의 글자 하나에 시선을 두어보세요. 그때 비로소 이 땅이 품고 있는 치열한 문명융합의 역사가 생생하게 와닿을 것입니다. 다음 터키 여행 루트에 잔토스와 레툰을 꼭 담아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whc.unesco.org/en/list/484
